Exhibitions

2024 엄미술관 기획 초대전
아오노 후미아키: 무지의 기억이 열리다
2024년 4월 4일 - 9월 15일

물(物)과 무지(無知)의 기억




 인류의 물(物)에 대한 숭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물을 쟁취하기 위해 벌어지는 진풍경을 일컫는 ‘오픈런’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의 획득은 삶을 영위하는 궁극의 수단이 될 터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의 가치를 재단하는 전권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찍이 우리는 물신주의가 초래할 재앙에 대해 수없이 자각하고 이에 대해 경계하였지만, 여전히 물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주체가 되고 있고 우리는 서서히 사물들의 범람으로 파생된 환경 생태학적 문제들로 매 순간 위태로이 살아간다. 이러한 물욕에 더하여 오늘날 시장 지향의 성과는 ‘새로움’에 대한 욕망까지 부추긴다. 새로움은 ‘유행’이라는 역사적으로 지속성이 없는 가치절하적 의미를 동반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너무나도 새로운 것들에 열광한다. 새로움을 갖춘 물, 즉 신상(新商)에 대한 과도한 열풍은 이제 친숙한 하나의 소비 행태로 인식될 정도이다.


물(物)에 대한 ‘낯설게 하기’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아오노 후미아키(青野文昭, 1968~)는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왜곡된 물의 위상에 다시 균열을 가하고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한 자동화된 지각을 멈추고, 자신의 적극적인 시지각을 개입시킨다. 이질적인 물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낯선 모습의 작품을 보며 관객은 그곳에 놓인 사물들의 역사와 흔적을 살피며 기억해 내고 상상한다. 이 순간 적어도 아오노 작품에서 세상의 주체는 오롯이 관객이 된다. 

 낡음과 새로움에 대한 고정된 이분법적인 사고 역시 아오노의 설치 작품들 속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새로움을 장착한 소위 말하는 ‘신상’은 그의 작품 속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 단지 새로움은 낡음의 진정한 가치를 부각해주는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아오노는 작품을 통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말했던 ‘간접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사물이 가진 시간성의 가치에 주목했다. 갓 만든 장(醬) 보다 시간을 담아내 발효의 과정을 거친 장이 깊은 맛을 가지듯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은 인간의 작위로부터 멀어지고 자연의 지배가 한 층 더 커진 사물들이다. 아오노는 노화된 사물들을 통해 그것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무릇 그의 성공적인 물의 ‘낯설게 하기’ 덕분에 관객은 이제 망막의 표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아니 알 수 없었던 ‘무지(無知)의 기억들’이 열리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물(物)의 발견-해체-복원 그리고 변용까지

 2024년 엄미술관의 첫 전시 《무지(無知)의 기억이 열리다》는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 《환생, 쓰나미의 기억, 2014. 4. 24 ~ 6. 1》에 이어 한국에서 열리는 아오노 후미아키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아오노 후미아키는 일상적인 오브제의 예술화 과정을 통해 사물이 가진 고유한 시간성을 파헤치며 사물에 내재한 일상, 감정, 기억 등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복원한다. 물성에 관한 탐구가 그의 작업의 의미론이라면 언캐니한 복원과 수리는 그의 창작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조각은 물체를 깎고 자르고 이어붙이는 장인적이고 상업적인 공정을 갖는 방식의 만들기 행위가 아니라 삶의 잔해물과 폐기물을 늘리고 이어 붙이고 대체하고 혼합하여 본래 사물이 가졌던 지나간 흔적을 남기고, 동시에 현재의 복구를 증명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관습 속에 감추어진 무지(無知)를 발견해내고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촉감과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며 조각의 범위를 확장한다.

 1991년 첫 전시에서부터 그의 작업의 테마는 줄곧 ‘복원(復原)’이었다. 그의 복원은 이전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의 복원이 아니라 물의 파괴, 재생, 순환에 대한 실험이다. 이는 복원이 있기 전의 기억과 망각, 복원 후의 재생 상태에서 발현되는 새로운 관계와 구조에 대한 골똘한 탐색이다. 초기 시기에는 주로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부식되거나 손상된 형태의 골판지, 나무, 종이 등을 물리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보충하는 방식으로 한 평면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1996년부터 그는 일상에서 ‘발견된 재료(found material)’를 매체로 활용하였고, 1998년부터는 폐기된 사물을 수리 확장하여 복원을 거친 조형물로 거듭나게 했다. 창작 중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작가는 새로운 형태가 접목된 완전히 변용된 형식의 규모 있는 설치물을 제작한다. 물론 일찍이 서구의 동시대 미술에서 지나간 시간을 재현하는 전략의 한 방편으로 레디메이드(ready-made), 발견된 사물(found object), 전유(appropriation), 유물(relic)과 같은 매체들은 흔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오노의 작품을 볼 때 낡고 헌 재료를 통해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서구의 흔한 전략이 아닌 일본 풍토 속의 이질적인 것들의 다층적인 공존 관계가 불러오는 결합과 분열의 속성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공존하고 중첩 시켜 알려지지 않고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았던 ‘무지(無知)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지금, 바로 여기, 이 장소에 생동감 있게 엮고 있다. 이러한 다소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융합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매우 생명력 있게 다가온다. 

 2011 동일본 대지진 참사는 아오노 후미아키의 창작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굳이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작업의 키워드가 복구와 복원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는 없다. 초인적인 자연력 앞에서 복원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이미 그 효용마저 상실했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것을 재건하는 대신 작가는 지각의 대이동과 흔들림으로 인해 낯선 장소로 떠밀려온 수많은 사물에 결합과 변용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 새로운 장소로 표류한 각각의 역사가 담긴 물들을 수습하여 결합하고 대체하며 상처를 꿰매고 봉합한다. 이식되어 다른 곳에 놓여있지만, 그 사물들의 이전 생활에 대한 기억이나 상실의 흔적들은 살아있는 형태로 다시 꿈틀거린다. 아마도 이러한 변용을 누구는 환생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치유나 재생이라고 부를 것이다.

 본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 설치작 중 일 부분은 지진 재해 후 수습한 물건들을 매체로 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배(Ship, 2012)> 역시 재해 지역인 이시노마키(石巻市)에서 수집한 폐선을 활용한 작품이다. 난파되어 쓰임을 다한 폐기물로 전락한 배를 탁자가 이끌어주고 서랍장이 받쳐준다. 각각의 기억과 시간을 가진 변형되고 부식된 파편들의 집합체는 비록 삐걱거리지만, 자신과는 무관했던 사물들에 서로 의지하며 예술이라는 제2막의 서사를 시작한다.

 이번 전시에는 조형물 이외에도 빛바램, 부식, 얼룩 등 시간의 흔적과 연장(extension) 및 복원의 흔적이 함께 공존하는 평면 오브제들, 콜라주를 활용한 사진 작업, 드로잉이 포함된다. 이러한 작품들 역시 매끈한 결합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어김없이 무너뜨리고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이종혼합을 특징으로 한다. 


지속적인 물(物)의 해방을 위하여

지금껏 엄미술관은 여러 전시를 통해 사물과 환경의 관계에 대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아오노 후미아키는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그 속성을 탐색하며 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엄미술관과 그 궤를 같이한다. 전술하다시피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사물에 대한 집착과 과욕에서 비롯된다. 아오노 후미아키는 추앙되던 사물이 쓰임을 다한 후 버림받고 경시되는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노골적으로 파헤치고 복원과 변용의 과정을 통해 사물을 환생시킨다. 그는 사물을 자연의 지배를 받는 위치로 되돌리고 자연의 순환구조 속으로 회귀시키려 한다. 작가의 상상력과 새로운 관점 덕분에 단순 쓰레기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사물들은 기능 중심의 관점이 아닌 후천적 가치를 지닌 예술적 실체로 변모된다. 물성의 껍데기와 기표들이 현혹하는 세상에서 아오노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사물과의 관계 맺음의 형식은 어쩌면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 축적이 아닌 순환궤도 속에 놓여있는 아오노의 사물들은 사회에서 요구했던 다양한 현실 속의 짐을 벗어 던져버리고, 관객에게 무지(無知)의 기억을 선사하며 대화를 유도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해방되어 가고 있다.


엄미술관 학예사 김주현


Mending, Substitution, Incursion, Coupling, “Restoration of a Red Signboard Collected in Ishinomaki, Miyagi, Japan, after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and Tsunami”, 2013, metal, timber(chest of drawers), plywood, acrylic paint, 316x150x155cm

Artist
아오노 후미아키
1968~


 

일본의 동시대 미술가 아오노 후미아키는 물(物, Mono)을 중시하는 모노하(物派)의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자연 그대로의 물성을 드러내는 순수 조형물이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후기 창작으로 갈수록 그는 물의 속성에 더하여 작가적 상상력을 개입시켜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탄생시킨다. 특히 그는 사물이 사회적 함의에서 벗어나 표류하는 방식에 흥미를 가지며, 주로 사물로의 기능과 쓰임이 다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특유의 제작 기법인 수리(mending), 대체(substitution), 연장(extension) 등의 방식을 통해 새로운 변용(變容)을 시도한다. 이처럼 그는 사물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며 사물에 얽힌 기억과 겹쳐진 시간성에 주목한다.

Biography
2024 아오모리 국제예술센터(ACAC), 아오모리, 일본
2020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20 에프터글로우》, 요코하마 미술관, 가나가와, 일본
2019 센다이 미디어 테이크, 센다이, 일본
2017 《컨서베이션_피스_여기서 저편으로 파트A》, 무사시노시립 기치조지 미술관, 도쿄, 일본
2015 센다이 아티스트 런 플레이스(SARP), 센다이, 일본
2014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013 갤러리 K, 도쿄, 일본
2012 갤러리 앤 아틀리에 턴어라운드, 센다이, 일본
1997 미야기현 미술관, 센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