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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현 展 : MNEMOSYNE 므네모시네-기억의 강
2024년 10월 10일 - 2025년 1 월 31 일
조덕현(Cho Duck Hyun, 1957~) 개인전

'기억'의 미학
 
 망각은 현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기억 상실의 문화는 점차 가속화된다. 신기술이 경이롭지만 그 대단한 능력 덕분에 우리의 기억하려는 의지와 기억할 수 있는 역량은 점점 줄어든다. 여기, 사진이라는 기술 복제의 산물을 수작업의 유일무이한 원본으로 대체하며 집단 망각의 위기에 저항하는, 어제의 와 오늘의 를 연결 짓는 작가가 있다.
 조덕현(Cho Duck Hyun, 1957~)은 흑백 사진을 실제처럼 재현하는 사진 드로잉(photo-drawing)이라는 작업 방식으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현실의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작가이다. 40년 남짓한 전 창작기간 동안 그의 작업은 설치, 영상, 아카이브, 발굴 프로젝트 등으로 변화와 확장을 거듭했지만, 전 창작을 관통하는 동일한 키워드는 기억이다. 그의 창작 속 기억의 대상은 초기작 <20세기 추억>(1990)에서와 같이 가족 혹은 무명의 개인에서 시작하여 근현대사의 표상에 가려진 실존 인물들로 확대된다. re-collection(2008), (2015), 에픽 상하이(2018) 등과 같은 작품에서는 재난, 난민, 전쟁 등과 같은 거대 서사를 배경으로 실제에 상상력과 허구가 더해진 풍성한 내러티브와 시각적 연출 효과를 통해 파편화된 개인의 기억들을 공감각적으로 다룬다. 그간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테마로 한 조덕현의 전시가 스펙타클한 시공간적 연출과 개연성 있는 내러티브로 관람객과의 적극적인 교감을 이끌었다면, 이번 엄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경건하다.
므네모시네(MNEMOSYNE)-기억의 강을 타이틀로 하는 이번 전시에서 므네모시네기억의 강을 관장하는 그리스 신화 속 기억의 여신을 일컫는다. ‘기억의 강은 지하세계에서 전생을 망각하게 하는 레테(Lethe)의 강과 상반되게 마시기만 하면 모든 기억을 되돌아오게 만든다. 이 같은 신화를 모티브로 작가는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과거에 대한 잊혀진 기억들을 소환하여 현재를 투사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다. 작가는 므네모시네를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된 과거 흑백사진 속 인물들을 시공간에 현현한다. 이는 한 가족의 존재했음을 알리는 작가의 응답이자 애정 어린 애도이다. 이 가족의 이야기와 기억의 편린들은 작가의 동시대적 장치들과 뒤섞이고 중첩되며 화이트 큐브의 절제된 공간을 비가시적인 기억이 상호 침투하는 다층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전시의 주인공은 고미술 수장가이자 개성의 신진엘리트였던 욱천 진호섭(秦豪燮, 1905~1950)과 그의 주변 인물이다. 욱천은 학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를 발굴하고 수집하였던 문화예술품 수장가로서 당시 고유섭, 황수영 등 개성 출신 문화재 관련 인사들과 교류하며 우리의 문화를 보존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하지만 외세의 침입과 이념의 대립으로 정국이 혼란하던 상황 속에서 욱천은 이남으로 운반하던 문화재를 북측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압수당한다. 이후 6·25 동란 중 욱천은 문화재를 되찾으려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이에 대한 결실을 얻지 못한 체 한 많은 삶을 뒤로한다. 이처럼 문화재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과 비극적인 삶은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흩어지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아스러져 과거 속에 사라졌다. 개인의 미시사를 포착하고 순간의 찰나를 영원한 원본으로 탈바꿈시키는 조덕현에게 욱천의 사진첩은 아마 쉬이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한 미적 체험이자 아찔한 푼크툼(punctum)의 순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타자의 시선과 나의 기억
 
 전시장을 들어서면 실제 인체의 크기만큼이나 확대된 역사 속의 인물들이 관객과 눈을 맞춘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카메라 옵스큐라의 눈으로 보여진 객관적 대상이 아닌 재현을 가장한 작가의 응시로 재탄생한 대상이다. 보는 행위는 망막의 일부분에 관련한 협의의 의미가 아닌 우리의 인지와 지각들이 총출동 하여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라캉(Jacque Lacan)이 말한 상징계라는 기존의 관습과 언어체계를 뛰어넘는 바라봄이다. 그의 응시는 재현된 세계 이상의 비가시적인 것을 볼 수 있고 일방향의 시선이 포착하지 못하는 이면의 것을 관객에게 일깨워준다. 이제 작가의 응시로 새롭게 태어난 대상은 일차적인 감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며, 전시장에서 주체인 관객은 객체와 대상에 불과했던 캔버스 속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이어나가게 된다. 한 공간에서 주체로서 관객의 과 화가의 응시’, 타자로서 작품 속 인물들의 시선이 얽히고설켜 기억에 대한 풍부한 서사가 만들어진다.
 실제 캔버스 속 인물들과의 눈 마주침형태는 다양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저 높은 곳에서 고고한 시각으로 관객을 내려다보던 욱천 선생 부부는 전시를 다 돌아보고 난 관객들과 어느새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다.(<므네모시네 >) 마치 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고통에 대해 공감한 관객들의 인간적인 교감에 수용하고 화답하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인물 사진에서 외형적인 생김새를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나와 빤히 눈 마주치고 있는 낯선 누군가의 초상은 그의 깊은 내면을 응시하도록 이끄는 묘한 힘이 있다. 빛의 강약, 명암, 톤 등의 회화적 전략과 이미지의 깊이감과 질감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해석은 관객의 의식을 섬세하게 일깨우며 그들이 그림 속 인물을 살아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말을 건네도록 유도한다. 때로는 캔버스 속의 낯선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그와 나와의 시선은 어느덧 중첩되고 교차된다. <므네모시네 >에서도 여인의 시선은 맞은편에 설치물을 감상하는 나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된다. 작품에 대한 나의 시선이 단순히 본다(see)’를 의미한다면 나는 다른 주체인 여인에게 보여지는(tobe seen)’ ‘응시(gaze)’의 대상인 것이다.
 
 
기억과 시간성
 
조덕현은 시간을 재현하는 작가이다. 관객은 할머니의 오래된 사진첩을 들추어보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 듯 하지만 이내 작가가 그림으로 재현한 시간들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는 나와 뒤섞여 육화(肉化)됨을 알 수 있다. 이제 관객은 단순한 타임라인의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의 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그간 조덕현이 편집과 몽타주의 내러티브 형식으로 주변부를 살피고 시간을 재현하며 어떻게 보여주고 설득할 것인가에 치중하였다면, 이번에 그는 느낀 것을 작품 속에 담담하게 담아낼 뿐이다. 그는 수정하거나 파편화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어긋남을 의도하며 관객의 의식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즉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억과 시간을 다루며 그저 관객 앞에 무심히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라는 고정된 시간에 박제되어있는 이미지들 앞에서 어떻게 관객은 지금’, ‘라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을 결부시킬 것인가?
《므네모시네에서 욱천의 앨범과 관객을 연결시키고 관객의 기억과 상상력을 매개하는 주체는 3점의 설치물이다. 과거를 오마주 하는 공간 속에 시간의 갭을 뛰어넘는 미디어 아트를 비롯한 동시대 작업들이 펼쳐진다. 이는 시지각적으로 전시를 풍요롭게 해주고 관객에게 색다른 흥미를 선사하지만, 전시 속 의미는 훨씬 더 다중적이다.
 전시장 일 층에서 이 층으로 가는 계단 벽면에 설치되어있는 <므네모시네 설치>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 형식의 설치물이다. 낡은 재료를 통해 과거를 소환하려는 작가의 시간 재현의 장치이다. 골동품 수집가인 지인이 소장한 수많은 유물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전시장의 사각지대에 배치했다. 이는 주로 사람의 형상이나 신체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미스테리한 사물들이다. 이처럼 미술의 재료로 바뀌어 전시장에 놓여있는 오래된 물건들은 자연스럽게 관객의 깊은 곳을 건드리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내 안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나 떠올려 본 적이 없는 나에게서 거의 잊힐 뻔한 기억들은 전유된 작가의 오브제를 통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이제 기억에 대한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관객은 자연스레 전시장에 재현된 과거의 시간들을 의 기억으로 치환하고 의 현재와 미래에 대입시킨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캔버스 작업으로 복귀하고 클래식한 묘사를 강조하였듯, 의미적인 측면에서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현재와 조우하고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과거라는 시간을 톺아보고 현재와 과거를 재맥락화 시킨다. 미디어 작품인 <므네모시네 설치>에서는 8개의 영상이 담긴 모니터가 무한히 반사되고 확장되는 거울 속 공간 안에 놓여 물의 다양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송출한다. 흩어지고 뭉치고 솟구쳐 오르는 물의 모습은 태곳적부터 존재하는 심연 속 기억의 파편들이다. 캔버스 회화를 보며 잡힐 듯 말 듯 스쳤던 우리의 기억의 폭은 <므네모시네 설치>에서 증폭되고 현실화된다. 가상의 공간이자 미래와 맞닿아 있는 이 무한의 공간 속에서 마치 현재에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도 과거는 당신 곁에 있다라고 말하는 듯 거울에 비친 맞은편 캔버스 속 여성이 차분히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므네모시네 >)
또 다른 설치작인 <므네모시네 설치 >은 엄태정의 글귀로 이루어진 텍스트 조형물이다. 테라스를 막은 가벽에 컷 아웃 형태로 표현된 글귀는 계절과 날씨에 시시각각 반응한다. 이는 빛과 어둠의 자연요소를 통해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시각적 장치이다. 자칫 엄숙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에 텍스트와 자연을 이용하여 관객에게 신선한 시각적 자극을 준다. 이는 의미론적으로도 전시의 주제와 긴밀히 연관된다. “너에게서 나를 본다 네가 있어 내가 있으니 너는 내 비교할 수 없는 하나라는 울림이 가득한 글귀는 과거와 현재, 클래식과 컨템포러리라는 상반된 시간성의 연결을 의미한다. 이처럼 므네모시네전시장에는 서로 다른 시간성 속에 놓여있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가 공명하고 있다.
 
시간과 기억에 대한 변증법적 동시대성
 
 한때는 현재였으나 지금은 과거인 시간들은 다시 기억을 통해 현재가 되고 미래에 관여한다. 므네모시네에서 기억을 테마로 다루는 과거의 시간들은 이처럼 현재와 연계되고 맥락화되어 미래를 바라본다. 작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을 시간과 수고를 들이는 수행의 미학으로 전환하며 이런 비가시적인 관계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재현 또는 상상의 서사를 통해 또 때로는 직접적인 발굴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체취를 찾고 대항기억을 축적해나가는, 이처럼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종착점은 지금이고 현재이고 동시대이다. 그의 과거 특정 순간에 멈추어 있는 듯한 시계의 초침은 결국 동시대를 향해있다. 다수의 기억과 시간을 탐색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변증법적 동시대성을 구현해가는 작가에 의해 이번 엄미술관의 공간은 다층적 기억과 시간이 공존하는 엄숙한 신전(神殿)으로 탈바꿈한다.
 

 엄미술관 학예사 김주현
                                                                                                                                                                                                                                                                                                                       




Artist
조덕현
2024

 조덕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동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교수 역임.
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 주요 개인전

2024  "110and", 춘포도정공장, 익산
2023  "109and", 춘포도정공장, 익산
2022  "108and", 춘포도정공장, 익산
2021   "mirrorscape',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2020  "to thee", 대구미술관, 대구
2018  "에픽 상하이", pkm갤러리 서울
2015  "님의 정원-조덕현 아카이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5  "꿈", 일민미술관, 서울 외 다수

- 주요 수상경력

2019   이인성미술상, 대구광역시 수여
2001  제2회 한불문화상,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 수여
1996  '이달의 예술가상'. MBC/삼성문화재단 공동수요
1995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체육부 수여
1990  동아미술제 대상, 동아일보사